기다렸다 이동하기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정혜린은 정혜린이 것과 들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은 분명하게도 정혜린이 아닌 다른 사람이 것과 들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대상 앞에서도 둘은 절대 같을 없다. 그런데 정혜린을 이루는 무수한 장면들이 정혜린 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혜린의 몸은 애초에 정혜린 만의 것이 아니지않을까?

이야기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극장은 이야기의 몸이라고 있을까. <오차의 범위:정류장들>은 것이지만 나만의 것이 아닌 자리로서의 풍경을 매개로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이전에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책에서 꿀벌 난초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식물이 번역한, 이 꿀벌에 관한 유일한 기억은 사라지는 꽃이 그린 그림이다” 1)

살아있는 우리가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들을 매개하여, 그 부재를 깊이 가리킬 수 있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의 연결감은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거기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러웨이의 말처럼 기억을 되짚고 번역하고 그리하여 당신앞에 펼쳐놓을 풍경은 내가 본 바로 그 풍경 너머 연결되고 싶은 순수한 욕망이자, 자신의 풍경에 타인을 초대하는 환대의 기억이라고 볼 수 있다.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은 장소와 공간의 대립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중략) 그에게 공간은 ‘실천된 장소’, ‘이동하는 것들mobiles이 교차하는 곳’이다. 도시계획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장소로서 규정된 길을 공간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보행자들이다.2)

정류장을 떠올려보자. 그곳이 기차역이든 버스 터미널이든 공항이든 상관없다. 정류장은 불특정 다수가 임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다. 거기엔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보게 되는 낯선 장면,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갑작스런 소란에 이끌리듯 따라 가보는 발걸음들이 흩어져 있다. 상황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오차의 범위:stations>는 마치 기차가 여러 역들을 차례로 지나듯이 이동하는 몸-관객과 그들 앞의 매체들이 위계를 가지지 않고, 공연 자체가 하나의 정류장이 되기를 상상한다.


1) 트러블과 함께하기,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마농지, p.126, 꿀벌 난초의 꽃의 모양은 교미를 갈망하는 암컷 꿀벌의 생식기처럼 보인다.

2)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상길·이윤영 옮김, 아카넷, 2017, p.99




연극은 늘 삶에 빚을 지고 있다. 그 어떤 매체보다 너무나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배운 것들을 연극에서는 연습할 수 있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안심이 되며 동시에 가장 불안한 지점이다. 무수한 실패들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의 실패를 넘어 다음 실패로 가는 과정에 연극이 있어왔다. 내가 연극에 빚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동안 공연을 만들면서 겪어왔던 실패들이 삶에서 더 이상 실패가 아니게 된 순간들이 있다. 실패에서 실패로 연결되는 이 경로에서 이 둘의 지원에 힘입어 삶과 연극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하다.

두 영역 모두에서 역시나 가장 큰 실패는 타자 앞에서 발생한다. 판단해버리기, 정의를 선점해버리기, 편 가르기, 무마하기. 느닷없이 다가온 타자는 나를 가끔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가 그래서 같이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위협을 끊임없이 해온다. 나는 가끔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모든 회피 충동을 이겨내고 결국에 나와 타자는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연루된 채 함께 서 있게 된다. 내가 이성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환대가 수행 가능한지 늘 확인하고 싶다. 연출에게 배우를 만나는 일은 바로 그 연습이다. 나는 배우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알고 싶고 동시에 끊임없이 모르고 싶다. 각자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서로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중 무엇이 더 좋을까. 무대 위에서 배우의 말하기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을 계속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이 더 좋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차의 범위]의 영어 제목을 관용으로 해석되는 tolerance라고 지었다.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오차와 오해를 안고 연극으로까지 나아가는 연습을 연극 만들기 안에서 구성원들과 함께 해보고 싶었다. 이 연습이 화자들에게도 유효하다면 극장의 관객들에게도 유효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의 진심은 청자에게 필연적으로 가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 때에 청자가 보내는 응답의 방향은 더 넓어진다.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당신이 본 것, 거기서 일어나는 일과 여기서 감각하는 일이 구분될 수 없는 상태 안에서 우리는 꺼져가는 연결감을 다시 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성이라는 것은 시공간을 쉽게 초월해버린다. 지구 반대편의 죽음들이 얼마나 쉽게 내 눈앞에 펼쳐지는가. 동시대인으로서 목격자라는 책무를 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을 감각하고 반응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우지 않으면 몸은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불타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오차의 극장을 위한 작은 안내서]  

  • 만남의 제안자를 화자라고 부른다. 
  • 화자는 만남들 전, 만남의 장소와 두 개의 질문을 정하여 청자에게 미리 초대장을 보낸다. 
  • 두 개의 질문은, 원작 <용의자의 야간열차>에서 촉발된 질문일 수도 있고, 낯선 청자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 혹은 궁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작은 우리 모두의 가방 속에 들어 있다.
  • 화자와 청자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만남을 기록한다. 
    대화에서 촉발된 것이든, 대화로 가는 길목과 관련된 것이든 만남과 관련된 파편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이를 테면, 만남의 장소에서 본 풍경, 소리, 가다가 주운 것, 이야기 속의 기억이나 단어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파편과의 연결고리는 자신만 아는 것이어도 무방하다.  



<오차의 범위:정류장들>은 다와다 요코의 소설『용의자의 야간열차』에서 시작되었다. 책을 읽은 후, 정혜린은 세 명의 화자-권정훈, 배선희, 허윤경에게 만남을 청하는 초대장을 보낸다. 이후 이들은 다른 네 명의 화자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만남을 청한다. 네 명의 화자들은 이 대화-만남을 바탕으로 하나의 도시를 만든다. 

2024년 04월 19일,  화자 김그레이스, 다이애나밴드, 백종관, 오로민경은 서로 다른 곳에서 화자들에게  도시를 미리 보여준다. 

권정훈, 배선희, 허윤경은 자신이 먼저 가 본 도시의 기억을 안고, 그 이전의 만남들을 경유하여 다음 극장으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배선희 님. 



다음은 첫 번째 오차의 극장으로의 여정을 위한 안내사항입니다. 




만나는 때 : 2024년 3월 7일, 13시 30분

만나는 곳 : 고속터미널 지하 1층, [경부선/영동선] 5번 승차장 앞 벤치. 




먼저,

만남의 장소로 오기 전, 열 두개의 도시 중 하나를 선택해주세요. 

가능하면 만남 직전에 그 도시를 한 번 읽어봐주세요.




그리고 다음 두 질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주세요. 

첫 번째. 당신은 작별인사를 어떻게 하시나요? 기억에 남는 작별의 순간이 있나요? 

두 번째.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혹은 당신을 불안에서 해방시킨 낯선 풍경의 경험이 있나요? 




이 메일을 확인하고, 차를 마시고, 집을 나서고, 하늘을 확인하고, 길을 걷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순간들이 여정일 것입니다. 

보고 듣고 감각하는 몸에 묻은 모든 것들은 당신과 나를 따로 이동하게 하고, 같이 멈추게 만들 거예요. 

만남을 극장으로 만드는 시도를 같이 해보아요. 

우리의 이야기가 사실이어도,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이미 만남은 시작되었어요. 


그럼 곧 만나요. 

안녕!
안녕하세요, 윤경 님. 

첫 번째 오차의 극장으로의 여정을 위한 안내사항입니다. 


만나는 날 : 2024년 03월 09일, 15시 00분

만나는 곳 :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출국장 하나은행 환전소 앞 벤치 


먼저,

만남의 장소로 오기 전, 열 두개의 도시 중 하나를 먼저 선택해주세요. 

가능하면 만남 직전에 그 도시를 한 번 읽어봐주세요.


그리고 다음 두 질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주세요. 

첫 번째. 연습실에서의 경험 중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경험은 무엇인가요?

두 번째. 어제 당신이 만난 눈썹이 아름다운 학생은 당신에게 무엇을 건네주었나요? 


이 편지를 확인하고, 차를 마시고, 집을 나서고, 하늘을 확인하고, 길을 걷고,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순간들이 여정일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맡고 감각하는 몸에 묻은 모든 것들은 당신과 나를 따로 이동하게 하고, 같이 멈추게 만들 거예요. 

우리의 이야기가 사실이어도,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이미 만남은 시작되었는걸요. 그러니까 이야기도 시작이 되었을지도요. 


그럼 곧 만나요. 

안녕!
안녕하세요, 권정훈 님. 

첫 번째 오차의 극장으로의 여정을 위한 안내사항입니다. 


만나는 날 : 2024년 03월 08일, 14시 00분

만나는 곳 : 서울역 KTX 타는 곳 7번 플랫폼


먼저,

만남의 장소로 오기 전, 열 두개의 도시 중 하나를 먼저 선택해주세요. 

가능하면 만남 직전에 그 도시를 한 번 읽어봐주세요.

그리고 다음 두 질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주세요. 

첫 번째. 당신은 기차에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잘못 내린 건가요? 혹은 시간도 타는 곳도 모든 것이 정확했으나 기차가 출발하지 않았나요? 

두 번째. 모든 것이 멈춰버린 도시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 편지를 확인하고, 차를 마시고, 집을 나서고, 하늘을 확인하고, 길을 걷고,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순간들이 여정일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맡고 감각하는 몸에 묻은 모든 것들은 당신과 나를 따로 이동하게 하고, 같이 멈추게 만들 거예요. 

만남을 극장으로 만드는 시도를 같이 해보아요. 

우리의 이야기가 사실이어도,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이미 만남은 시작되었어요. 


그럼 곧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