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를 믿는 극장이 바라는 연극
-연출 정혜린과 화자 배선희의 대화록-
-연출 정혜린과 화자 배선희의 대화록-
정리 배선희
정혜린은 연극에게 질문하는 사람이다. “나는 네게 좋은 동료였는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부끄러웠다. 언제나 연극이 무척 좋거나 싫기만 했지 연극이 바라는 연극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유심히 들을 때 주변이 생생해진다던 혜린 연출의 말을 자주 생각했다. 잘 듣기 위해선 진심으로 물어야 했다. 오차를 믿는 극장이 바라는 연극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연극의 모습이기도 했다. 오차의 범위에 기대어 울고 웃으며 숨 쉬었던 몸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연극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 5월 초에 <오차의 범위 : 정류장들>이 끝났습니다. 저는 창작자로서 작업을 열심히 하고 나면 마음이 좀 헛헛해지기도 하고 괜한 의심이 다시 올라오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어떠셨나요?
“일단 공연이 끝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었고요. (웃음) 헛헛한 마음도 물론 있긴 있었지만 헛헛함보다는 이 공연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제가 이 공연을 되게 오랫동안 구상했기 때문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네, 기억을 찾아가는 그런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 기억을 찾아간다는 말이 인상적인데요. 기억을 찾는 동안 몸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요?
“그때는 맞았는데 지금은 틀린 것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웃음) 저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 시간을 들여서, 정말 그 기억을 찾다 보면 갑자기 그곳에서 새로운 게 발생하기도 해요. 근데 그건 과거의 어떤 일, 경험, 이런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것 같고요. 시간이 좀 더 뒤섞여지는 느낌이에요.”
(잠시 날씨 얘기)
-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혜린 연출님의 작업을 돌아봤더니 ‘오차’라고 하는 키워드를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하셨더라고요. (*런더앤싸이트닝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연극 <오차의 범위:픽션들(2021)>(이하 <픽션들>), <오차의 범위:OST(2023)>(이하 <OST>), <오차의 범위:정류장들(2024)>(이하 <정류장들>)을 공연했다.) 그래서 오차라는 키워드와 오차의 범위라는 주제에 집중을 하신 이유나 계기가 궁금했어요.
“저한테 ‘오차’는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시도이자 방법 같아요. 제 앞에 앉아 있는 배선희와 저 사이에는 절대 메워질 수 없는 간극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그 간극이 무서웠고, 타자와 세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방해물처럼 느껴지곤 했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 간극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간극이 저에게는 오차였던 것 같아요. 연극은 타자와 함께 있고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굉장히 유효한 방식이기 때문에 오차의 범위라는 이름으로 계속 탐구하고 있는 것 같아요.”
- 예전에 같이 길을 걷다가 오차의 범위는 “배우를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던 게 인상에 남았거든요. 그 부분을 좀 더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연극이라는 세계 안에서 연출인 저의 가장 맞은편에 있던 타자가 배우였는데요, 배우가 너무 어려웠어요. 배우의 언어나 그들이 어떻게 세계와 만나고, 그들이 만나고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요. 많이 헤매고 좌충우돌 했어요.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저 그리고 그 안에서 맺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과, 연극이라는 세계 안에서 연출로서 배우라는 타자를 마주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요.”
- 처음 <오차의 범위>를 만났을 때 똘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가 껴안는 범위가 굉장히 낯설었어요. 지금까지 연극을 해오면서 정확하게, 연습한 대로 해야 된다는 압박과 부담감을 자주 느꼈는데요. 혜린 연출님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열어 주었어요. 그렇게 열린 세계에서 훨씬 많은 것들이 발생하고 스며든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만남이 더욱 생생해지는 감각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연극하는 데 있어 고착된 관점과 관습적으로 하던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그런 맥락에서 이 공연이 배우를 위한 작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말씀하신 걸 들어보니까 연출로서 어떤 어려움을 겪으셨던 것이잖아요. 우리가 같은 말을 쓰고 있긴 하지만 이해가 완전히 같을 수 없고, 계속해서 다름으로 벌어지며 발생하는 간극을 없는 척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차를 계속 포착하고 탐구하신 것 같아요. 그동안 오차에 관한 작업을 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연극을 못 보신 관객분께서도 흥미로워하실 것 같은데요, 오차의 범위가 경유해 온 시간을 소개 부탁해도 될까요?
“방금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고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그 전제가 어느 순간부터 저한테 되게 큰 자유를 줬던 거 같아요. 오차의 범위도 그 불가능성 안에서 가능성의 자리를 찾는 작업의 연속성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했던 <픽션들>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지나가는 경로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이야기들은 절대로 원본의 상태로 갈 수 없다는 것. 할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시작된 질문이었어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넓게, 깊이 펼쳐지는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공연을 만들었어요. 이야기를 옮기는 입이 화두였기 때문에 <픽션들>은 확실히 배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같아요. ‘최초의 화자’와 ‘화자’라는 포지션이 있었습니다. 극장에 오기 전, 배우들은 최초의 화자 두 명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각각 전해 듣고, 자신의 몸을 통과한 그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어요. 이야기의 주제는 ‘언제 나는 한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에서 촉발된 것이었어요. 내가 들은 이야기와 무대에 선 이 순간 하고 싶은 이야기로 이야기 즉흥을 해보고 싶었어요. 무용수들이 즉흥 춤 추는 것처럼요.
<OST>에서는 인간의 몸만 이야기를 전달하는가, 다른 몸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어떤 모양일까? 이런 궁금증으로 배우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올 수 있는지, 그 자리에서 어떤 모양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았습니다. 한 명의 극작가와 두 명의 작곡가, 조명디자이너와 협력한 작업이고요. 극작가가 쓴 희곡을 두 명의 작곡가가 각자의 언어로, 그들은 작곡을 하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어서 소리의 형태로 이야기를 번역한 거죠. 관객들은 빛으로 쏘아지는 텍스트와 들려오는 사운드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계속 추적해 나가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 안에서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했습니다. 협력의 범위를 좀 넓혀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아요.”
- 이야기가 멀리멀리 굴러가는 광경을 계속 옆에서 지켜보셨을 거 같아요. 저는 오차의 범위 연극을 모두 봤었는데요. OST는 빛이나 소리가 모두 정확하게 설계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 공연은 무엇이 오차인가? 이런 질문을 품다가 그날의 날씨라던가 극장에 도착한 관객들의 몸, 극장의 분위기, 공기 같은 입자들이 이미 오차를 갖고 있나? 그러니까 극장의 환경 자체가 이미 오차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계속 써가야 하는 관객들 개개의 몸 그 자체가 오차였어요. 그것을 위해서 빛 소리 등이 정확하게 설계되어 있어야 했고요. 또 소리라는 배우도 오차였지요. 공연을 하시면 아시겠지만 배우가 맨날 같은 상태일 수는 없잖아요. 언제든 너무 힘든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비가 너무 많이 온 날, 몸이 젖은 관객들이 굽굽한 공기 속에서 공연을 봐야할 때 떠올려보면 공연은 날씨나 같이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요. <OST>도 그랬어요.
아주 깜깜한 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있어본 게 처음이었는데요. 그러다보니 귀가 예민해지더라고요. 신촌극장 벽이 얇아서 낮이나 밤에 그 벽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매번 달랐고, 습도가 높을 때의 소리 질감도 다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게 마치 배우들이 공연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 오차의 범위 연극의 관객이었을 때 몸의 감각 자체를 그러니까 어떤 상태를 만나게끔 해준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요. 그 연극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좀 울고 싶은 기분이 됐어 라던가 좀 꿈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라는 식으로 주변에 소개하곤 했었어요. 평소 관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혹은 관객이 <오차의 범위>를 어떻게 만나길 바라시나요?
“관객... 너무 어렵고 잘 모르겠어요. (웃음) 전 일단 관객일 때의 저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같아요. 내가 관객일 때 언제 자유로운가 혹은 언제 충만한가. 또는 언제 좋은가, 너무 재밌나 이런 고민과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아요.
관객과 어떻게 같이 있을까, 어떤 상태로 우리가 같이 있을까 이런 것을 좀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마치 선물처럼 확 받을 때도 너무 행복하지만, 무척 자유로운 상태였을 때 극장이 좋은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극장에 오는 사람과 어떤 자유로움을 주고받을 것인가를 제일 많이 생각해요. 저에게 중요한 것은 타자의 존재가 마치 나의 존재를 구속하는 것만 같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가 나를 구속하는 것만 같을 때 혹은 나의 자유를 뭔가 막으려 할 것만 같을 때, 불안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가 존재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경험들이에요. 그런 경험이 극장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고 그리고 극장도 그것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도 그런 걸 계속 원했고 그 자유로움을 서로 주고받았기 때문에 극장이라는 공간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도 했고요. 오차라는 간극을 통해서 어떻게 같이 있을 것인가. 저한테 극장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서로가 있음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극장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는 얘기네요. 저도 항상 타자가 무섭고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솔직해지기 위해 대단한 용기를 품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무섭기만 한 타자가 사실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통로라는 말씀이 아름답네요.
개인적으로 <정류장들>에서는 어떤 풍경이나 소리, 이야기와 겹쳐진 몸들이 훨씬 더 우연에 맡겨진 것 같거든요. 관객들이 배우와 함께 이동하다보니 누가 배우이고 관객인가 하는 구분도 사실상 불가능했던 거 같아요. 무엇이 준비한 소리고 퍼포머인지 이런 구분이 의미 없고 각각의 만남들이 모두 연극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공연에서 본 관객들의 반응이라던가 기억에 남는 모습이 있으실지 궁금해지네요. 좀 전에 서로가 존재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느끼는 극장의 경험에 관한 얘기를 나눴는데요. 이번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어디로 갈지 전혀 예측 안 되는 상황이었잖아요.
(잠시 고민)
“‘범람원(*<오차의 범위 : 정류장들> 도시 중 한 곳)’ 앞에 앉아서 영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람이 생각나네요. 저도 안전 요원이었어서 하나 하나 유심히 볼 순 없었는데 지나갈 때 혹은 문 틈으로, 뭔가를 기다리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던 게 저한텐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뭔가를 같이 기다리고 각자 생각에 잠기고 싶었어요. 정류장에서 뭔가를 기다릴 때 제가 제일 많이 하는 게 그냥 생각에 잠겨서 내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기차가 오가는 것도 보고 천장을 보기도 하고 뭔가 설비를 하는 노동자들을 보기도 하고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이 극장에서도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렇게 뭔가를 좀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이 공연에서 얼마나 유효했는진 알 수 없지만 그러고 싶었어요. 같이 기다리고 싶었고, 생각에 잠기고 싶었고. 그런 시간들이 저한테 소중한 거 같아요. 극장 밖에서도.
극장 안에서는 늘 새로운 세계가 집약적으로 되게 짧은 시간 안에 확 덮쳐 오잖아요. 그 범람이 너무 아름답고 좋을 때도 있지만, 가끔은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로, 듣고 있지 않는 상태로 있고 싶기도 하거든요. 그런 여러가지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중간에 화장실도 가고 늦게 들어오고 도시를 만지고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저는 즐거웠어요.”
- 한 번은 기차 이미 출발했는데 도착하신 관객분이 뒤늦게 도시에 합류하신 얘기를 제게 해주셨어요. 굉장히 즐거워 보였는데 (웃음) 그런 관객의 모습을 볼 때 어떠셨어요?
“지각 할 수도 있잖아요. (웃음) 좋았어요. 극장이라는 곳에 가면 항상 모든 게 이렇게 맞추어져 있잖아요. 물론 연극은 짜맞춤이기도 하지만. 저는 언제나 거기서 스크래치 같은 존재 같거든요. 그 짜맞춰진 세계에 스크래치를 내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렇게 되기도 하는데 그냥 그래도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관극할 때 늘 가지는 두 가지 욕망 있잖아요. 화장실 너무 가고 싶어, 하지만 그 사이에 이 부분을 놓치면 어떡하지? 근데 화장실 너무 가고 싶은데? 아니면 공연 직전에 막 뛰어와서 겨우 시간 맞춰 들어왔지만 체력 소진으로 30분 동안 졸고 일어났을 때. 이미 공연을 30분 놓쳐버린 다음이고 모든 게 어그러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기차라는 건 늦으면 다음 기차 탈 수 있으니까. 다른 표로 바꿀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몰래 탈 수도 있고, 공연이 정류장, 대합실, 기차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걸 가능하게 하고 싶어서 이런 종류의 공연을 생각한 것 같기도 하고. 뭐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욕망이었어요. 나를 버리지 말아줘.(웃음)”
- 관객분이 도시에 있던 사물(낚시찌)을 만져서 일부가 엉켰는데 다이애나밴드가 사다리를 갖고와서 엉킨 실을 풀면서 연극이 시작 되었던 날도 있었어요. 굉장히 아름다웠던 순간이었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이 공연의 구조여서 가능했던 거 같아요. 보통은 그렇게 되면 내일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어떤 방책을 마련한다거나 그랬을 것 같아요. 근데 갑자기 발생한 문제를 천천히 해결하는 사람을 공연 때 가만히 지켜보는 순간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예전에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간 적 있어요. 공항에서 2시간 정도를 대기를 해야 했는데요, 그 때 저희 옆쪽으로 안전모 쓰고 유니폼을 입은 정비사들이 엄청나게 커다란 지도를 들고는 핸드라이트로 천장을 비추면서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 갑자기 작은 미니카가 저쪽에서 와서는 어떤 사람을 실어가고. 엄청 연극적이라고 느꼈는데, 그들이 지나가고 고개를 딱 돌렸더니 맞은편에 어떤 남자가 한 쪽 손에는 아이의 손, 다른 쪽 손에는 해바라기 꽃다발을 들고 비행기 시간표 전광판을 한참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또 한참 쳐다봤어요. 그들이 잠시 있다가 떠나고 나니 이쪽의 정비사들이 벤치에 앉아서 쉬기 시작했죠.
제가 연극적이라고 느꼈던 상황들은 대부분 극장 바깥에 존재했고 그 모든 우연이 만들어낸 연극적인 순간들을 어떻게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욕망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정류장들>에서 관객들과 배우들 심지어 어셔분들과 극장 곳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냥 각자의 길을 갔을 뿐인데 연극적인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발생했어요. 마치 줄이 꼬였을 때 푸는 시간 같은. 짜놓은 경로 바깥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 이 공연은 ‘잘못함' 자체를 없애버린 것 같아요. 내 탓이라고 자책할 필요가 없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1인 공연을 워낙 많이 했다 보니 이번 연극에서 무려 50명의 관객이 함께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즐겁더라고요. 같이 있다는 감각이 제게 소중했어요. 이번 연극에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시는 예술가분들을 화자로 부르셨어요. 그분들을 어떻게 한 자리에 모으셨는지? 어떤 마음으로 함께 연극하자는 제안을 하셨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리고 화자라는 역할이 픽션들 때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이미 모두 화자인 가능성이랑도 맞닿아 있는 건가요?
“네. 정확히 그렇고요. 이번에 작업을 제안한 분들 모두 제가 과거에 작업을 본 적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나 시선이 만들어내는 장면과 소리 앞에서 생각에 잠겼던 경험이 있어요. 그 시간들이 저한테 너무 귀하거든요. 그 시간들이 제 몸 안에 있다가 그분들을 부른 것 같아요. 백종관..! 그레이스..! 배선희..! 이렇게. (웃음) 그래서 함께 그런 시간을 만들고 관객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게 부름이 되었죠. 화자들은 자연스럽게 왔어요.(웃음)
화자라고 하는 것은 ‘자리’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화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고 화자 앞에는 청자가 있잖아요. 저는 화자와 청자가 있는 그곳이 바로 극장이라고 인식하고 있거든요. <오차의 범위>의 극장의 모습이기도 해요. 어떤 사람이 화자의 자리에 오는 것은 동시에 청자의 자리에 오는 것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저희가 만남을 진행을 하면서 화자가 예비 청자에게 초대장을 보냈지만 정작 만나면 누가 초대를 했고 누가 초대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잖아요. 저는 그게 극장이 만들어지는 방식 같아요. 그 두 자리가 하나가 되는. 어디가 화자의 자리이고 어디가 청자의 자리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 <정류장들>에서의 화자들은 관객이라는 청자가 다시 화자의 자리로 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 연극의 화자들과 관객이라는 청자의 자리가 불분명해지고, 이 관객들이 다음에 자신들의 극장에서 다른 관객을 만났을 때 그 자리가 이런 식으로 막 뒤섞이게 되는. 그런 의미에서 ‘자리’라는 것이 저한테 중요하고 거기에서 오차의 범위가 기인한 것 같아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같아지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 저는 그게 같이 있는 상태 같아요.
길에서 사람들이 제 옆으로 얘기를 나누면서 지나가요. 가끔 어떤 단어가 저의 귀에 꽂히면서 혼잣말을 할 때가 있어요. 찰나지만 그 사람과 내가 대화를 하고 있는 순간처럼 느껴져요. 물론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런 순간들이 재밌고 그것이 가능해지는 자리가 오차의 범위에선 중요해요.”
- 만남 자체가 <정류장들>의 연습이었어요. 만난다는 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일이죠. 근데 우리는 온라인으로 만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보니 시공간의 제약을 훨씬 더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차도 달랐고. 거리가 아주 멀고 시간이 다른데도, 어떻게 만나면 좋을지 계속 얘기 나누고 고민하면서 연출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자리를 함께 발견하려고 한 것 같아요. 근데 흥미로운 게 정혜린 연출님은 <정류장들>의 모든 만남을 동행 하셨잖아요. 이동을 한다는 것도, 만남의 자리에 계속 같이 있다는 것도 몸이 진동하는 일이잖아요. 어떠셨을지 궁금해요.
“그래서 침대에서 못 일어났나 봐요. (웃음)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일단 저도 약간... 이렇게 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겠어요.(웃음) 그냥 했고 그런 게 있었어요. 이 일곱 명의 사람들을... 잘 모르잖아요.(웃음)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나보다 더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건데, 이들이 사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그냥 만나는 거잖아요. 최근에 다른 친구랑 얘기하면서 용건 없이 만나는 건 힘들다 이런 얘기를 나눴는데요, 타자를 만나는 건 늘 지치는 일이니까. 근데 진짜 용건도 없이 그냥 냅다 무작정 만나보자 이렇게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될까? 두 분이 더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하기도 했었거든요. 근데 옆에 있으면서, 그런 불안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고. 그런 만남 자체가 뭔가 시공간을 좀 바꾸는 것 같기도 했고... 기묘했어요. 만나는 게 뭐지? 만나는 게 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곁에 있었어요. 한 번은 울창한 숲에서 만났는데 제가 그 숲에 정신 팔려서 정작 들어야 할 화자들 얘기를 못 듣기도 했어요. 저의 상태도 그 상황의 시간과 공간에 완전히 내맡겨졌죠. 화자들이 저에게 도통 알 수 없는 역할을 주기도 했고요. 알 수 없는 거구나. 그런데 그냥 길을 가는 거구나. 길을 가다가 누군가를 만나고,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고, 좀 더 지켜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막 더 해보기도 하는 그런 경험들이 신기했어요. 그리고 제가 낯선 사람을 잘 안 만나서인지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는 게 보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 <오차의 범위>에서의 만남은 우리가 준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연습. 저는 그게 다였던 거 같기도 해요. 그러면서 저는 이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감각이 좀 짙어졌어요. 이 사람과 다음에 다시 만나더라도 오늘 만난 이 순간이 다시 돌아 오진 않는다는 걸 배웠어요. 동시에 어느날 다시 지금을 기억했을 때 그날의 진동이나 맡았던 냄새, 같이 봤던 풍경이나 소리 같은 것들이 물밀듯이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거라는 것. 그래서 신기하고 기묘한 시간이었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아요. 굉장히 찰나 같은데 계속 돌아오고 몸에 여전히 묻어 있기도 한... 그런 감각이 혼자 있는 시간에 계속 돌아오다 보니 (오차의 범위는) 정말이지 끝이 없다 싶더라고요. 만남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걸까? 싶기도 하고.
저는 혜린 연출님이 연습 때 화자들 간의 만남를 연극을 위한 텍스트나 재료로 접근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만나는 시간 동안 뭘 만들어야 한다가 우선이 아니어서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집중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그게 그냥 정혜린 이라는 사람 같아요. 목표하는 것 없이 들리고 보이는 것에 충실한 사람. 어쩌다 듣거나 엿 본 장면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어요. 저는 그게 혜린 연출의 작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태도 같아요. 엿듣고 엿보는 감각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엿 듣고 엿보는 거 좋아하고요. 짜맞춰진 세상의 스크래치 같은 저의 존재를 지우지 않는 방법을 찾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은데요... 연출이라는 게 뭘까. 어떤 세계를 제시하고 그 세계로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저는 약간 어떤 세계로 가자라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 같아요. 어떤 길목에 같이 있어 보는 것을 더 잘 할 수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길목에 같이 있다가 보고 들은 좋은 것들을 “너무 좋지 않아?” 이렇게 말해 주는 걸 더 재밌어 하는 거 같고요. <오차의 범위>의 모든 공연에서 매번 연출이 뭘까 이런 생각을 계속 했거든요. 연출은 잘 듣고 잘 보는 사람이구나. 그런데 연출 역시 결국에는 자리를 내줘야 되잖아요. 그래야 관객이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자리를 내어주는 동시에 저를 지우지 않는. 같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자리를 내어주는 방식이 이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후차적으로 정리를 해봤지만요. 사실 공연 할 땐 그런 생각을 하진 못했고 그냥 즐겁고 재미있는 거. 내가 재밌으면 이 사람도 재밌지 않을까요? (웃음)”
- 예전에 저한테 “유심히 들을 때 지금 여기가, 주변이 생생해지는 것 같다.”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그때도 저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라던가 마음 같은 것들을 좀 더 나눠주실 수 있으세요?
“저희 엄마는 같이 차 타고 지나가다가 밖에 바다가 있으면 “빨리 창밖에 봐 봐. 저기 바다가 있어!” 그러시거든요. 제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웃음) 친구들이랑 차 타고 어디 가는데 밖에 산이 펼쳐지고 절경이 펼쳐지면 “얘들아, 빨리 창밖에 봐 봐.”이러는데, 그걸 제가 극장에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방금 들었고. 아 근데 저 이거, 이걸 제가...“
혜린, 불투명한 용기를 가져와 뚜껑을 연다.
- 이게 뭐예요?
“이거 이야기 못 들은 숲에서 주워온 거 거든요. 플라타너스 열매예요.”
-향기가 엄청나네!
“이거 줍는다고 이야기를 하나도 못 들었어요.(웃음)”
-너무 예쁘다.
“갑자기 생각났어요.”
- 이게 뭐예요?
“이거 이야기 못 들은 숲에서 주워온 거 거든요. 플라타너스 열매예요.”
-향기가 엄청나네!
“이거 줍는다고 이야기를 하나도 못 들었어요.(웃음)”
-너무 예쁘다.
“갑자기 생각났어요.”
- 저는 이런 씨앗을 볼 때 그 너머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렇게 갈색으로 마르기 전에 또 다른 모양이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 상상을 좀 하는 편인데, 혜린 연출님과 작업하면서 개인적으로는 혼잣말 같은 생각들에 응답받는 기분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어요. 이야기를 못 들은 숲에서 주워온 거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시는데, 그 이야기 일부가 이미 여기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날의 이야기와 그날의 혜린 몸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는 연출님과 작업하며 믿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어요. 자신을 가장 믿지 못하는 불안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 했고요, 자리를 낸다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마련한 후 그 자리로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 같아요. 기다림은 네가 분명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 네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고요. 그러한 믿음의 힘을 오차의 범위에서 키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번 공연에서 기획 단계 때부터 베리어프리 공연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시고 접근성 매니저님을 섭외 하셨잖아요.
“네 맞아요.(웃음) 맞죠.”
- 왜 웃으셨어요?
“그렇게 대단히... ‘그래. 이번에는 접근성을 해야지.’ 이렇게 생각을 한 게 아니었고요. 사실은... 정류장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 올 수 있어야지. 막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웃음) 엄청 계획을 했던 건 아니었어요. 막연하게 ‘정류장은 누구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냥 이렇게 생각을 했고 그러던 찰나에 우연한 기회로, 운명적으로 접근성 매니저님 만났거든요. 엄청 막 계획적으로, “그래. 이번에 접근성도 한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좀... 스스로 약간 그래요.“
- 정말 좋은 생각 같은데요? 모두 다 (정류장에) 있잖아요. 극장도 그래야 하기 때문에 배리어프리(barrier-free)라던가 배리어컨셔스(barrier-concious)같은 용어에 대한 고민부터 많은 시도를 하며 접근을 넓히고 있고. 위스퍼링의 경험이 저는 되게 특별했어요. 조용한 순간에 계속 위스퍼링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굉장히 시적으로 만나질 때도 있었어요. 미리 정해진 대본을 관객에게 전달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보이고 들리는 것을 전달하다 보니 위스퍼링 하신 다인님과 하늘님도 이 연극에서 화자로 동참되신 거죠.
그래서 화자가 일곱 명이 아니라 아홉 명으로(웃음) 정말 모두가 화자인 가능성으로 열린, 아홉 명보다도 훨씬 많은 화자들이 극장에 있었던 연극. 혜린 연출님은 어떠셨어요? 접근성의 자리를 넓히면서 좋았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고 좀 어려웠던 순간도 있으셨을 거 같아요.
“마침 다인님께서 작년에 <정류장들>(*서울연극센터 “연극 하기와 보기(2023)” 참여작) 공연을 보셔서 이런 저런 제안을 연습 때 해 주셨는데, 최근에 접근성 라운드 테이블 가서도 얘기를 했지만 제게는 접근성이 공연과 분리 되진 않았던 거 같아요. 다인 님께도 극장에서 관객과 같이 여행하는 동행자였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고요. 그것이 다인님께 어떤 자유로움을 줄 수 있었고, 그래서 같이 여행하는 친구나 동행자처럼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기차 타거나 정류장 가면, 어떤 풍경을 나는 보는데 너가 못 볼 때, 마치 제가 아까 어떤 사람들이 여기서 이렇게 했던 걸 옆 사람에게 말해 주는 것처럼, 사실 접근성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래서 공연의 어려움과 접근성의 어려움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 같고. 매니저님이 엄청난 인내심과 순발력으로 이 공연을 정말 재미있게 같이 여행해 주셨어요. 너무 다행이고 행운이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제가 이번에 알게 된 것은, 그때 저희가 휠체어 관객이 복도로 진입 할 때 경사로 놓는 것의 어려움으로 인해 (경사로를 설치하지 못해) 그 경로를 쓰지 말자 이런 얘기를 몇 번 논의 했었잖아요. 그 때 재논의하면서 닫힌 경로를 만들지 않는 방식의 접근이 좋았고. 앞으로 접근성을 할 땐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극장에 같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때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그런 종류의 배움들과 그렇게 알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좋았고요. 위스퍼링 해설의 경우는 그것이 엄청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여기서도 시끌시끌 저기서도 시끌시끌 여기서 막 쓱싹쓱싹 얘기하고 다니고.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어떤 공간에서 누구랑 만나고 누구랑 여행을 하다 보면. 정류장이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 선후 관계가 불분명해지네요. 이걸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식이 아니라 접근성과 연극 자체가 그냥 하나였던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계속 되길 바랐는데 그럴 수 있었던 부분이 있었고, 좋았어요.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 극장 문을 다 열어놨고 극장의 모든 통로들을 다 경로로 활용을 하였잖아요. 휠체어 관객이 지나가려면 경사로를 설치 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럼 그 길을 같이 다니지 말자, 거기는 통로로 쓰지 말자 이런 방향으로 얘기를 하다가, 연출님이 그것들을 막지 않고 다 지나 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방향으로 다시 얘기를 꺼내주셨을 때 저도 배울 수 있었어요. 어떤 자리에서든 뭔가를 막거나 제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가능한 방식으로 얘기를 나눠야 겠다고요. 그럴 때의 가능성은 불가능성이 포함되는 가능성 같거든요. 지나갈 수 있는 몸이 있고 그렇지 못한 몸이 있을 때 모두 못 다니게 막는 게 아니라 그냥 열어놓고,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리로 가고 여기로 못 다니는 사람은 다른 쪽으로 돌아서 오게끔 한 뒤 같이 기다리기. 오히려 못 지나가는 경로에 의해서 무수히 많은 경로가 있음을 환기할 수 있어 좋았어요.
“저는 이 여행자들이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는. 어쨌든 배우들이 열려 있는 상태가 되면 경로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 했고. 배우님들도 그 생각에 동의해 주셔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고 했을 때. 배우들이 관객의 동행자라면 충분히 같이 여행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 했어요.”
-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풍경과 들리는 소리 이런 것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게 좋았어요. 이 세계에 진공 상태라는 건 없는 거구나. 계속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에게 화자가 되는, 화자이자 청자인 몸이 섞인 세계에 살고 있구나.
“제가 인터뷰를 좀 해도 될까요? 화자의 자리와 청자의 자리를 바꿔볼래요? (웃음)”
- (웃음) 공연이 끝난 후에 연출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못 본 장면들이 우리에게 너무 많고(웃음) 그랬을 때 연출은 어떤 역할일까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시다고 이해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연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극의 시작과 끝인 걸까...
“연극의 범위…오차의 범위이기도 하겠죠? 글쎄요. 극장이 있는 곳이면 연극도 있지 않을까요? 연극과 극장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연극의 고유함인 것 같기도 하고. 살아있음의 본질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극이냐고 했을 때에는 연극의 입장에서 삶과 죽음을 구분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삶과 죽음은 구분이 안 되는 것이잖아요. 구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연극이 계속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돈도 안 되고 뭣도 안 되지만 아직까지도 하고 있고, 사람들은 극장에 가고 싶어 하고, 모이고, 극장에 있고, 그런 게 아닐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극이냐고 묻는 것은 삶과 죽음을 구분해내는 문제와도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 이렇게 또 깨달음이 또 오네요.
“저도 잘 몰라요...”
- 작업자로서 품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겠구나, 뭔가를 다시 규정하려 하지 않았나, 그것의 범위를 정하려고 하지 않았나. 저 자신에게 요즘 하고 있는 질문을.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 부분만 본다는 건 무엇인가, 연극은 어디서부터 시작이며 어디까지가 연극인가, 혼자 있는 시간에 뭔가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 또한 연극인가 이런 식으로 다시 규정하려 하지 않았나. 그것의 범위를 정하려고 하지 않았나. 지난번에 뒤풀이 때도 오차의 범위는 어디까지 허용하는가, 정말 위험해지는 순간도 허용하는지 이런 질문을 던진 적 있는데, 나는 왜 그렇게 계속 범위를 정하려고 하는건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계속 조정되는 것, 바뀌는 것이 결국 오차의 범위이고, 삶이고, 연극이구나 라는 생각이 얘길 듣는 동안 들었어요. 연출님은 제게 연극과 일상을 분리시키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시기도 했지요. 왜 그런 요청을 배우에게 하셨는지 좀 더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분리하지 말아야 된다! 라고 강력하게 말하지는 않았고요. (웃음) 분리를 안 해야 된다. 보다는 분리가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까 화자와 청자가 있는 곳은 극장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연극도 거기 있지 않을까 근데 그때 화자와 청자가 언제나 건강한 상태, 언제나 괜찮은 상태로만 있지 않잖아요.
아플 수도 있고, 죽고 싶을 수도 있고, 울고 있을 수도 있고, 기분이 너무 좋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이 극장에서 다 단절된 채 무대에 오른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되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배우도 어디가 불편하면 그 상태로 무대에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프면 아픈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럴 때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고. 언제나 늘 그 상태라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연극은 그 불가능성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배우한테도 그러한 불가능성의 영역이 당연히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근데 할 수도 있죠…
- 분리가 안되는 거죠. 시간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그거를 분리 시킨답시고 공연 직전 1시간 전이네 하면서 에너지 드링크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데요. (웃음)
“하지만 가능하기도 하죠. 가능한 사람들이 있고.”
- 착각하는 거 아닐까.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그런 분리가 잘 안 돼요.”
- 숨기는 걸 잘할 순 있겠죠.
“제가 그걸 못해요. 숨기는 걸...”
- 숨긴다는 걸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건 아니고 어떤 상태를 계속 동일한 상태로 지속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인데, 그걸 지향하다 보니 (숨겨야 할 때가 있었어요.) 근데 그러지 않기로 했을 때 우리는 어떤 가능성으로 흘러 갈 수 있는가. <오차의 범위>는 제게 연극의 성공과 실패, 좋음과 나쁨이 아닌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게끔 해요.
“연극이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절대) 올라갈 수 없지만 올라감으로써 발생하는 아주 작은 차이들이 연극을 계속 운행하는 힘 같기도 해요. 뭔가 계속 이루는 힘인 것 같은데... 배우는 애초에 존재부터 불가능 그 자체잖아요. 햄릿을 연기한다고 햄릿이 될 수 없으니까.“
- <오차의 범위>에서는 도달해야 되는 지점 없이 지속 해야 되는 상태가 저에게는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상태라 함은 잘 만나기 위해 몸을 닫거나 방어하는 게 아니라, 열어놓는 것에 가까운. 배우라는 존재는 정말 통로구나, 배우가 만진 걸 관객이 따라 만지고 배우가 지나간 자리에 관객이 따라 오고, 배우가 본 것을 같이 보는 순간들.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감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몸이 훨씬 통로라는 걸 알아차렸는데, 혜린 연출님은 정류장들이라는 제목이 이미 그러하듯 극장 자체도 계속 통로가 되길 바라셨어요. 앞으로는 극장 문을 못 닫을 것 같다고 얘기도 하셨는데, 정말인가요?
“정류장이 극장이 되기도 하고 극장이 정류장이기도 하는 그게 극장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극장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로 가는 길목인 거죠. 그래야만이 세계가 엄청 다양해질 수 있는 거 같아요. 갈 수 있는 세계가 많아지면 모두에게 좋잖아요. 근데 극장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곳 같고. 타의 존재가 나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구나. 우리가 자주 말했지만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일 수 있구나. 이런 것을 우연하게 느낄 수 있고 혹은 우연치 않게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 같아요. 늘 좋을 수만 없고 좋지 않을 수만 없는. 정류장이 그렇잖아요. 친구랑 싸우고, 애인이랑 헤어지고, 씩씩거리거나 울면서 기차를 타면 거기 있는 사람들 다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너무 기분이 좋으면 또 완전 반대가 되고 마치 그런 것처럼. 그런 통로인 것 같고 어떤 자리, 아까 제가 말했던 어떤 자리, 통로, 극장, 정류장, 이런 것들이 제 삶에서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머무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고 나를 거기에 붙잡아두지도 않고 보내지도 않고. 어떤 자리에서 그냥 잠시 같이 있는 것. 그런 순간들이 되게 소중하고 그래서 극장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좋은 곳들을 그래서 극장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 멀리 있는 존재를 지금 여기서 아주 가깝게 만나는 경험 혹은 그게 가능하다라는 믿음이 연출님에게 있고 그 믿음을 사람들과 더 나누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요. 좀 대단해 보였어요. 왜냐하면 멀어진 관계라던가 혹은 이미 이별한 관계라던가 그런 존재들이 그립거나 해도 만날 수 있다거나 이런 게 아니다 보니까 그냥 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았고. 이대로 영영 못 보거나 멀어질까 봐 부러 슬픈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할 때가 있는데, 옆에서 지켜 본 혜린 연출님은 멀다와 가깝다의 감각이 같은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신기했어요. 그 마음과 생각에 힘을 받기도 했어요. 어떤 괴로움이 사라진 건 아닌데, 예컨대 보지 못한다는 건 고통일 수 있잖아요. 그게 당장 사라진 건 아닌데, 그 자체로 견딜 수 있는 힘이 저한테 생기더라고요. 왜냐하면 나는 그를 매일 생각하니까 그렇다는 건 그 존재가 내 안에서 조금도 작아지지 않는 일이기도 하니까. 근데 이런 믿음이 연출님을 만나면서 더 단단해 졌어요. 연출님은 왜 그런 믿음을 여태껏 간직해왔고 연극 안에서 계속 품고 계신지를 좀 더 듣고 싶어요.
“전 모두가 저에게서 멀리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가깝게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을 했던 것 같고요. 꼭 내 옆에 있어야만 같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이를테면 죽은 친구가 가끔 저를 부를 때가 있어요. 저를 부르던 목소리를 무심결에 떠올리는 거겠죠. 그때 저는 걔랑 같이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가 전화로 지금 뭐 하고 있고, 오늘 뭐 먹었고, 날씨는 어떻고,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할머니랑 같이 있는 것 같고요. 연극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태양을 가져오지 않아도 우리가 지금 태양을 같이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잖아요. 그것이 연극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세상은 언제나 저 멀리 있는데 그 세상과 같이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연극이랑 만난 것 같아요. 소리든 기억이든 나의 몸 안에서 재생이 되고, 연결이 되고, 같이 있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은 느낌이 아니라 진짜 같이 있는 것이라고 믿어요.”
- 그럼, 이제...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이라든가, 요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음 작품은 잘 모르겠고요... (잠시 고민) 오차의 범위를 계속하고 싶긴 해요. 왜냐하면 이번에 또 하면서 발생한 질문들도 있고. 제가 감각한 오차를 좀 탐구해 봐야 되겠다 좀 들여다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저한테는 오차가 너무 제 삶이고 저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되게 연극적인 순간들을 만나게 되면 그것을 극장으로 또 가져갈 수도 있고요. 만남의 곁에서 제가 목격한 찰나와 영원이 뒤섞이는 어떤 순간들, 그러니까 종관 감독님이 숨과 꿈이 범람한다고 했는데 진짜 어떤 시간이 막 범람하는 것만 같은 그런 순간을 명료하게 감각했어요. 그런 만남의 곁에서 혹은 누군가의 앞, 뒤, 옆에서 감각했던 어떤 것들이 저한테 아직 남아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좀 들여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오차의 범위 또 할 것 같은데요?
- 그때 또 저랑 같이 하실 건가요
“네.”
- 고맙습니다. 끝으로 오차의 범위 정류장들에 오셨던 관객분 혹은 함께한 동료에게 남아있는 말이 있을지?
“일단 너무 감사하죠. 감사하고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너무 즐거웠고요. 이제 또 각자의 삶에서 그런 재미있고 기쁜 순간들을 계속 잘 만나시면 좋겠어요.
- 슬플 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슬퍼해야죠. 음... 재밌게 사셨으면 좋겠는데요? 즐거웠어요. 고마웠고요. 뭐라고 말해야 되지? 각자의 삶을 잘 이어가시기를! 그러다가 즐거운 순간에 또 만나면 좋겠네요.
- 혹시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인데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지?
“다 말했어요.”
- 많은 얘기를 우리가 잘 나눈 것 같아요. 이제 제가 녹취를 풀면서 정리를 잘 해보겠습니다. 이것으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정혜린 연출님과 오차의 범위 인터뷰를 진행해 봤는데요. 진행 관련해서 한마디 해 주시죠. 인터뷰 어떠셨나요?
“말을 할 수 있도록 정말 잘 만드시네요.”
- 너무 감사합니다. 기쁨이 크네요.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면서.”
- 제가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천재 배선희였습니다.”
- 천재 정혜린이었습니다. 천재 이소정이었습니다. 천재 보름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와!”
5. 25. 화. 혜린 집에서.
선희, 혜린, 소정, 보름 함께.
인터뷰 마침.
선희, 혜린, 소정, 보름 함께.
인터뷰 마침.